10월3일(금요일) -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습니다(렘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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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선지자들의 공통점은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앞에 순종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4.5km 정도 떨어진 베냐민 지파의 기업인 아나돗은 솔로몬 당시에 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아비아달은 다윗의 왕위의 계승에 대해 아도니야를 도왔다가 왕위에 오른 솔로몬에 의해 제사장직이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던 곳이 아나돗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태어나고, 자랐던 ‘아나돗’은 레위지파에게 허락된 48개 성읍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다른 제사장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곳이었습니다.
요시야가 왕으로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B.C 722년부터 약 100년간 앗수르가 북이스라엘 지역을 다스려왔던 땅을 요시야가 부분적으로 회복을 시키기 시작합니다. (왕하 23:4~9)에 의하면 요시야는 앗수르의 상징물인 우상의 산당들을 제거합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소외된 지역,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약관 20세 정도인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소외된 땅 아나돗에 있는 예레미야,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전혀 유명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우리를 예레미야처럼 부르셨습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시대 가운데 있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4~7) 하나님은 나를 디자인하고 설계하신 진정한 주인이며 나를 소명 가운데 부르시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능력을 주실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요시야 왕이 대대적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5년 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전체가 영적으로 흑암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그 시대를 깨울 인물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소외된 곳 아나돗 그리고 제사장으로도 자격 미달인 20살의 청년을 선택합니다. 그는 언변의 탁월함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고백했던 것처럼 정말로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성별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신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예레미야는 어떻게 반응했나요?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설계하신 분입니다. 나의 잠재적 능력에 대해, 나의 진정한 가치의 세밀한 부분까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나를 디자인하고, 설계하신 나의 주가 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르신 이가 하나님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조건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능치 못할 것이 없고, 행하지 못할 것이 없으신 분이 부르셨을 때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능력도 이미 주셨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 그렇게 했을까요? 부르실 때 그 음성 가운데 이미 새겨 넣으셨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8~9)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권능이 함께 부여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아멘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스스로 봤을 때도 아이와 같은 존재였던 약관의 예레미야에게 사명을 감당하면서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 것을 명합니다. 예레미야가 왜! 두려워했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먼저 바라봐야 하는데 자신의 존재, 자신의 위치, 자신의 능력을 먼저 돌아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보다 탁월하고,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는 상대가 먼저 보였던 것입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명하심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의 필연적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첫 번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아멘!’으로 응답하는 사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 가운데 파송하셨습니다. 파송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 앞에서든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거나 상대와 비교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 넘어질 조건만 생깁니다. ‘아멘!’으로 응답할 때 그 말씀이 성령의 능력이 되고,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 감화의 말씀이 되어 듣는 사람을 요동치게 만듭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 가운데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권능이 이미 부여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아멘’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10) 이 땅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향해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전자는 의식적인 절차가 강조되는 ‘위임식’이라면 후자는 사역자에게 감당할 사명이 강조되는 ‘파송식’입니다. 위임식 가운데는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 되신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사명이 하나님의 거룩을 회복시키는 영광스러운 사역임을 잊지 말도록 합니다.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것’은 죄악의 뿌리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불신앙을 향한 심판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이 세워지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일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일까요? ‘만왕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유서와도 같은 (딤후 4:7)의 한 절에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을 것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 땅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적용)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유한성을 가진 사람이 나를 부르고, 사명을 준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유한성을 가진 사람이 누군가를 부르고, 사명을 줄 때는 어떤 사람이 적당할까?라며 거기에 걸맞은 능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나의 능력과 재능을 보고 쓰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예외의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 앞에 우리가 행할 것은 ‘아멘!’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달려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선지자들의 공통점은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앞에 순종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4.5km 정도 떨어진 베냐민 지파의 기업인 아나돗은 솔로몬 당시에 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아비아달은 다윗의 왕위의 계승에 대해 아도니야를 도왔다가 왕위에 오른 솔로몬에 의해 제사장직이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던 곳이 아나돗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태어나고, 자랐던 ‘아나돗’은 레위지파에게 허락된 48개 성읍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다른 제사장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곳이었습니다.
요시야가 왕으로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B.C 722년부터 약 100년간 앗수르가 북이스라엘 지역을 다스려왔던 땅을 요시야가 부분적으로 회복을 시키기 시작합니다. (왕하 23:4~9)에 의하면 요시야는 앗수르의 상징물인 우상의 산당들을 제거합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소외된 지역,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약관 20세 정도인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소외된 땅 아나돗에 있는 예레미야,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전혀 유명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우리를 예레미야처럼 부르셨습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시대 가운데 있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4~7) 하나님은 나를 디자인하고 설계하신 진정한 주인이며 나를 소명 가운데 부르시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능력을 주실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요시야 왕이 대대적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5년 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전체가 영적으로 흑암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그 시대를 깨울 인물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소외된 곳 아나돗 그리고 제사장으로도 자격 미달인 20살의 청년을 선택합니다. 그는 언변의 탁월함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고백했던 것처럼 정말로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성별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신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예레미야는 어떻게 반응했나요?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설계하신 분입니다. 나의 잠재적 능력에 대해, 나의 진정한 가치의 세밀한 부분까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나를 디자인하고, 설계하신 나의 주가 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르신 이가 하나님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조건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능치 못할 것이 없고, 행하지 못할 것이 없으신 분이 부르셨을 때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능력도 이미 주셨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 그렇게 했을까요? 부르실 때 그 음성 가운데 이미 새겨 넣으셨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8~9)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권능이 함께 부여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아멘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스스로 봤을 때도 아이와 같은 존재였던 약관의 예레미야에게 사명을 감당하면서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 것을 명합니다. 예레미야가 왜! 두려워했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먼저 바라봐야 하는데 자신의 존재, 자신의 위치, 자신의 능력을 먼저 돌아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보다 탁월하고,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는 상대가 먼저 보였던 것입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명하심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의 필연적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첫 번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아멘!’으로 응답하는 사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 가운데 파송하셨습니다. 파송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 앞에서든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거나 상대와 비교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 넘어질 조건만 생깁니다. ‘아멘!’으로 응답할 때 그 말씀이 성령의 능력이 되고,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 감화의 말씀이 되어 듣는 사람을 요동치게 만듭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 가운데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권능이 이미 부여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아멘’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10) 이 땅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향해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전자는 의식적인 절차가 강조되는 ‘위임식’이라면 후자는 사역자에게 감당할 사명이 강조되는 ‘파송식’입니다. 위임식 가운데는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 되신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사명이 하나님의 거룩을 회복시키는 영광스러운 사역임을 잊지 말도록 합니다.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것’은 죄악의 뿌리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불신앙을 향한 심판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이 세워지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일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일까요? ‘만왕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유서와도 같은 (딤후 4:7)의 한 절에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을 것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 땅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적용)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유한성을 가진 사람이 나를 부르고, 사명을 준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유한성을 가진 사람이 누군가를 부르고, 사명을 줄 때는 어떤 사람이 적당할까?라며 거기에 걸맞은 능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나의 능력과 재능을 보고 쓰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예외의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 앞에 우리가 행할 것은 ‘아멘!’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달려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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