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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4일(화요일) - 악의 익숙한 자의 모습(렘13: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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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죄로 오염된 세상에 물들지 말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가야 할 것을 세마포인 제사장 옷의 비유를 통해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제사장 나라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부패한 이들의 모습에는 더 이상 언약 백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교만하지 말 것과 하나님의 뜻은 반듯이 이루어진다는 강력한 어법을 통해 말씀합니다.
교만은 ‘높다’, ‘고귀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이 ‘주인’을 향해 교만하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은 주인의 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모습이 ‘교만하다’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모습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악에 익숙한 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어떤 악에 익숙한 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요?

(20~21) 만군의 여호와를 버리고 자신을 삼킬 세상과 결탁하여 그 속에서 번영과 영화를 꾀하며 하나님을 등지는 일에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방에서 오는 자’(20절)와 ‘너의 친구’(21절)는 바벨론을 말합니다. 남 유다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공으로 멸망 당하는 비참한 모습을 B.C. 722년에 목격합니다. 다급해진 남 유다는 앗수르 군대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대상을 찾습니다. 이때 그들이 찾은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신흥 제국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바벨론이라는 세력이었습니다. 이들과 동맹을 맺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들을 지켜줄 줄 알고 동맹을 맺었던 바벨론이 오히려 대적이 되며, 자신들을 사로잡아 갈 세력이 됩니다. 그 고통은 마치 산고를 겪는 여인의 고통과도 같을 것이라고 예레미야는 예언합니다. ‘산고의 고통’은 당시 가장 극심한 고통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던 표현 방식이었습니다. “네가 고통에 사로잡힘이 산고를 겪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바벨론이 동맹이 아니라 자신들을 다스리는 군주의 관계가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자신들을 지켜줄 것만 같았던 바벨론이 오히려 자신들의 대적이 되며, 자신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주는 대상이 됩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버리고 세상을 선택한 결론이었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이런 만군의 여호와를 버리고 자신들을 삼킬 자와 결탁하였던 이스라엘에게 번영과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등지는 일에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이들에게 나타난 결론은 하나님의 도우심은 사라지게 되고, 자신이 의지했던 세력에 의해 오히려 삼킴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 시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22~24) 영적 마비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면서도 선을 도모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며 자신이 악에 더욱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만듭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에 대해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만인이 보는 앞에서 여인의 치마가 들춰지는 것과 같은 수치를 당할 것이며, 맨발의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현실을 맞이하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 흑인의 피부가 백인의 피부가 될 수 없고, 표범의 반점이 물감을 지우듯이 지워질 수 없는 것처럼 악에 익숙한 모습은 그것이 습성이 되어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게 되며, 그 죄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악을 행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마치 선을 행하는 듯이 행하게 됩니다. 악에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영적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되면 악행이 선을 행하듯 거부감 없이 행해지게 됩니다. 영적 마비가 더욱 무서운 것은 자신이 행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향해 악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악행으로 인해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왕겨와 같이 심판받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같이 흩으리로다” 악은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행하고 있는지 그 자체를 못 느끼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하나의 습성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자신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죄에 대한 공의의 값조차도 알지 못하게 만듭니다. 영적 마비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면서도 선을 도모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며 자신이 악에 더욱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무서운 영적 질병 가운데 놓이게 된다는 것을 각인해야 합니다.

(25~27) 거짓을 신뢰하며 악에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자를 향해 하나님의 공의는 수치로 그 값을 반드시 묻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분깃이 하나님께서 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한 것에 대해 그 값을 묻습니다. ‘네 몫’, ‘네게 준 분깃’의 비유를 통해 그들이 당하는 심판이 자신들의 죄의 값임을 깨닫게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거짓을 신뢰하는 자는 악에 익숙하여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그 값을 수치 가운데 치르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유다가 수치를 당하고 고난을 받는 이유는 언약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거짓을 신뢰한 까닭이며,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영육간의 죄악을 저지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거짓을 신뢰며 악에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범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 값에 대해 치마를 얼굴에까지 들춰서 수치가 극치에 달하도록 하여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거짓을 도모하며 악에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자를 향해 하나님의 공의는 수치로 그 값을 반드시 묻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적용)
유다의 멸망이 바벨론이라는 외부적 환경에 의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적 환경으로부터 온 결론이 아닙니다. 그들의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악이라는 사탄의 비밀 병기에 넘어진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거듭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완고함은 표범의 반점을 물감 지우듯이 지울 수 없는 것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죄에 익숙한 모습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죄악은 악한 습성을 만들어내며 영적 무지한 상태에 놓이게 만듭니다. 악에 익숙한 모습에 빠져들지 않도록 늘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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