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4일(금요일) - 일치와 연합의 공동체(고전 1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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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2: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2: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2: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2: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2: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도입)
1세기 말과 2세기 초, 속사도 교부로서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일곱 서신을 기록할 때 바울 서신 가운데 하나인 고린도전서를 염두에 둡니다. 그는 이단으로부터 일어나는 내적 갈등과 로마로부터 가해져 오는 핍박에 따른 외적 갈등의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십자가’와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일치’와 ‘연합’으로 이끌었던 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 일어나고 있는 파벌의 문제, 영적 질서의 문제, 나눔의 문제, 은사의 문제 등 다양한 문제 거리에 대해 바울은 ‘십자가’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답을 찾도록 합니다.
고린도 교회 분쟁의 시발점은 그들의 신앙이 ‘그리스도 밖에서’ 사람 편에 서서 자기들끼리 ‘일치’와 ‘연합’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패거리가 되고, 분쟁이 일어나는 죄악된 형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치’와 ‘연합’을 이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몸이고 성도는 지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된 신앙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세우기 위해 무엇을 허물고, 무엇을 세우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할까요?
(12~13) 그리스도 안에서 인본주의라는 모습의 장벽을 허물고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교회를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초월적 공동체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비춰낼 때 ‘몸’과 ‘지체’의 비유를 통해 교회가 ‘그리스도의 유기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당시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사용하여 그리스도는 ‘몸’이라는 것과 함께 그리스도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것을 최고로 여기는 ‘인본주의적 장벽’을 허물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인본주의의 장벽을 허물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본주의 장벽을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도록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일치’와 ‘연합’이 이뤄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이는 ‘유대인’과 ‘헬라인’ 그리고 ‘종’과 ‘자유자’에 대한 차별과 구별이라는 장벽이 허물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인격을 만들도록 합니다. 그 인격으로 교회의 모든 일에 대해 ‘일치’와 ‘연합’을 이루도록 합니다. 이를 통해 교회를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초월적 공동체’로 만들어가도록 합니다. 사람은 각자의 능력이 있고, 각자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구별되는 지위와 위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인본주의 측면에서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설명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인본주의 관점에서 보이는 인종의 차별성, 능력의 차별성, 가진 것의 차별성을 나타내는 편견이 허물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본주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성령의 일하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 공동체를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초월적 공동체’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14~17) 그리스도 안에서 시기와 질투의 장벽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각자에게 주어진 다양한 역할에 대해 서로 하모니를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다양한 은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치유의 은사’ 등 다양한 은사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은사를 다른 사람들의 은사보다 뛰어나다며 분쟁을 일으킵니다. 은사의 문제로 성령 충만한 교회가 아니라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교회가 됩니다. 바울은 몸과 지체가 분리될 수 없고, 몸의 지체는 서로 뛰어난 부분으로 경쟁하는 모습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피력합니다. ‘발’과 ‘손’이 상호 보완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눈’과 ‘귀’ 또한 상호보완적 기능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17절)
‘은사’는 그 사람의 뛰어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일하심을 나타내는 흔적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은사’는 그 사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은사’는 서로 가치를 자랑삼는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상호 대립과 불평의 관계가 아닙니다.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자랑삼는 것은 자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상대를 시기하게 만들고, 질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서로를 원수로 몰아가기까지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기와 질투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며 주어진 역할에 대해 서로 하모니를 이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18~21)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의 장벽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가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잠 8:22)은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라고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창조는 ‘조화’입니다. 사람 몸의 지체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이 은사의 문제를 사람의 몸과 지체라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따른 ‘조화로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각각의 ‘은사’가 가지는 기능은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를 담은 ‘조화로움’이 그 안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원 의미’를 담아내는 (잠 8:22)의 ‘조화로움’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기심이라는 장벽 안에 사로잡힌 자가 되어 (잠 23:21)의 말씀처럼 ‘빈곤함’에 이르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기심에 사로잡힌 자는 (잠 11:26)과 (잠 28:27), 그리고 (학 1:9)과 (사 5:8)의 말씀에 의하면 ‘저주’ 가운데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며, ‘화’가 그에게 미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성도 간의 교제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 의미’를 살려내는 것이니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가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적용)
일치와 연합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과 ‘일치’를 이루고, 어떤 것과 ‘연합’을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본주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진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복된 장면들을 만들어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교회를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초월적 공동체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서로가 하모니를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갈 때 하나님은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 의미’를 살려내는 ‘일치’와 ‘연합’은 ‘조화로움’이라는 하모니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의 세계를 향해 축복하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할지니라!”라는 언약의 결실! 아름다운 결실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2: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2: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2: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2: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2: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도입)
1세기 말과 2세기 초, 속사도 교부로서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일곱 서신을 기록할 때 바울 서신 가운데 하나인 고린도전서를 염두에 둡니다. 그는 이단으로부터 일어나는 내적 갈등과 로마로부터 가해져 오는 핍박에 따른 외적 갈등의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십자가’와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일치’와 ‘연합’으로 이끌었던 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 일어나고 있는 파벌의 문제, 영적 질서의 문제, 나눔의 문제, 은사의 문제 등 다양한 문제 거리에 대해 바울은 ‘십자가’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답을 찾도록 합니다.
고린도 교회 분쟁의 시발점은 그들의 신앙이 ‘그리스도 밖에서’ 사람 편에 서서 자기들끼리 ‘일치’와 ‘연합’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패거리가 되고, 분쟁이 일어나는 죄악된 형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치’와 ‘연합’을 이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몸이고 성도는 지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된 신앙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세우기 위해 무엇을 허물고, 무엇을 세우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할까요?
(12~13) 그리스도 안에서 인본주의라는 모습의 장벽을 허물고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교회를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초월적 공동체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비춰낼 때 ‘몸’과 ‘지체’의 비유를 통해 교회가 ‘그리스도의 유기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당시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사용하여 그리스도는 ‘몸’이라는 것과 함께 그리스도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것을 최고로 여기는 ‘인본주의적 장벽’을 허물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인본주의의 장벽을 허물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본주의 장벽을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도록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일치’와 ‘연합’이 이뤄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이는 ‘유대인’과 ‘헬라인’ 그리고 ‘종’과 ‘자유자’에 대한 차별과 구별이라는 장벽이 허물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인격을 만들도록 합니다. 그 인격으로 교회의 모든 일에 대해 ‘일치’와 ‘연합’을 이루도록 합니다. 이를 통해 교회를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초월적 공동체’로 만들어가도록 합니다. 사람은 각자의 능력이 있고, 각자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구별되는 지위와 위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인본주의 측면에서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설명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인본주의 관점에서 보이는 인종의 차별성, 능력의 차별성, 가진 것의 차별성을 나타내는 편견이 허물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본주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성령의 일하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 공동체를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초월적 공동체’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14~17) 그리스도 안에서 시기와 질투의 장벽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각자에게 주어진 다양한 역할에 대해 서로 하모니를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다양한 은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치유의 은사’ 등 다양한 은사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은사를 다른 사람들의 은사보다 뛰어나다며 분쟁을 일으킵니다. 은사의 문제로 성령 충만한 교회가 아니라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교회가 됩니다. 바울은 몸과 지체가 분리될 수 없고, 몸의 지체는 서로 뛰어난 부분으로 경쟁하는 모습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피력합니다. ‘발’과 ‘손’이 상호 보완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눈’과 ‘귀’ 또한 상호보완적 기능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17절)
‘은사’는 그 사람의 뛰어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일하심을 나타내는 흔적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은사’는 그 사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은사’는 서로 가치를 자랑삼는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상호 대립과 불평의 관계가 아닙니다.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자랑삼는 것은 자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상대를 시기하게 만들고, 질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서로를 원수로 몰아가기까지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기와 질투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며 주어진 역할에 대해 서로 하모니를 이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18~21)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의 장벽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가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잠 8:22)은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라고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창조는 ‘조화’입니다. 사람 몸의 지체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이 은사의 문제를 사람의 몸과 지체라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따른 ‘조화로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각각의 ‘은사’가 가지는 기능은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를 담은 ‘조화로움’이 그 안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원 의미’를 담아내는 (잠 8:22)의 ‘조화로움’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기심이라는 장벽 안에 사로잡힌 자가 되어 (잠 23:21)의 말씀처럼 ‘빈곤함’에 이르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기심에 사로잡힌 자는 (잠 11:26)과 (잠 28:27), 그리고 (학 1:9)과 (사 5:8)의 말씀에 의하면 ‘저주’ 가운데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며, ‘화’가 그에게 미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성도 간의 교제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 의미’를 살려내는 것이니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가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적용)
일치와 연합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과 ‘일치’를 이루고, 어떤 것과 ‘연합’을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본주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진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복된 장면들을 만들어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교회를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초월적 공동체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서로가 하모니를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갈 때 하나님은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 의미’를 살려내는 ‘일치’와 ‘연합’은 ‘조화로움’이라는 하모니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의 세계를 향해 축복하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할지니라!”라는 언약의 결실! 아름다운 결실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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